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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설교 메세지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 / 요 6:30-40 / 하용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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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교 : 하용조 목사 (온누리교회)
제 목 :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
본 문 : 요한복음 6장 30~40절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군중들에게 “너희들이 나를 따라오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주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우리가 매일 먹는 양식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먹는 땅의 양식은 썩는 양식입니다.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가장 큰 특징은 자꾸 먹어도 다시 배가 고프고 만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수가성의 목마른 한 여인에게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4장 13~1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물을 긷기 위해 우물로 온 여인에게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이 있는 것처럼 영원히 배고프지 않는 양식이 있습니다.

일용을 위한 ‘썩는 양식’

요한복음 6장 27절에는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는 말씀이 기록돼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세 가지 양식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매일 먹는 ‘썩는 양식’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입니다
.
우리는 평생 동안 매일 먹어도 결국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그것을 ‘썩는 양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매일 먹는 양식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양식은 생존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동물들의 세계에서 일차적인 관심은 먹이입니다. 종족 번식과 생존을 위한 ‘먹이 사냥’이 전부입니다.

둘째, 매일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하루라도 먹지 않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아무리 음식이 많아도 먹은 것 외에는 소화를 시키지 못합니다.

셋째, 양식을 얻기 위해서는 땀을 흘리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창세기 3장 17~19절을 보십시오.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풀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우리는 땀을 흘리며 수고한 만큼 먹을 양식을 얻을 수 있으며 거저 얻는 먹이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먹이를 얻기 위해 경쟁하고 때로는 전쟁도 불사합니다. 결국 전쟁은 ‘먹이 쟁탈’입니다.

사람들이 식탁을 꽃으로 장식하고 멋진 대화를 나누며 고상한 모습으로 식사를 하지만 결국 관심은 먹는 것에 있습니다. 주린 창자를 만족시키려는 게 ‘먹이’의 본질적인 특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양식을 ‘썩는 양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한 끼라도 양식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양식이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썩을 양식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그것을 위해 일하지 말라고 충고하십니다. 우리가 ‘먹이’를 위해 산다면 동물과 다를 게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은 먹는 것으로 사람을 조종하는 자입니다. 북한이 그렇습니다. 먹는 것으로 인민을 조정합니다. 사람의 밥줄, 목줄을 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25, 26절에도 비슷한 말씀이 기록돼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영원한 양식의 그림자 ‘만나’

본문 말씀에서 또 다른 양식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먹어본 적이 없지만 구약에 ‘만나(Manna)’라는 양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이 양식을 공급하셨습니다. 만나는 아주 독특하고 놀라운 음식입니다. 출애굽기 17장 15, 16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인수대로 매명에 한 오멜씩 취하되 각 사람이 그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취할지니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백 여 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다가 모세를 따라 홍해를 건너서 탈출했습니다.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가기 위해 40년을 광야에서 보냅니다. 마실 물도 없고 먹을 음식도 없으며 잠잘 데도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화려한 문명 아래 있지만 역시 광야 생활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했을 때, 하나님께서 40년 동안 독특한 양식 ‘만나’로 이들을 먹이신 것입니다. 30, 31절 말씀을 보십시오.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는데 모세가 줘서 먹었습니다. 당신이 메시아라면 우리에게 보일 표적이 무엇입니까? 모세는 만나를 주었는데 당신은 무엇을 주겠습니까?’라는 뜻입니다. 곧바로 32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예수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만나’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지상에 독특한 음식이 있었는데 모세가 준 만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의 말을 듣고 “만나는 모세가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정정해 주셨습니다.

만나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일하고 노력해 얻은 결과이지만 만나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거저 주신 음식입니다.

둘, 매일 만나를 주셨습니다.
귀찮아도 매일 음식을 먹어야 하듯이 ‘만나’도 매일 주셨습니다.

셋, 우리가 일용하는 양식과 성격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만나를 먹는다고 영생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만나를 먹고도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만나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이지만, 그것을 먹어도 사람들은 영생하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만나는 영원한 생명의 떡을 예표하는 양식입니다. 구약 시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를 먹으면서, 영원히 썩지 않는 양식을 주실 메시아를 바라보았습니다.

‘말씀’으로 오신 하늘 양식 예수님

썩는 양식과 만나에 이어 세 번째 양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생하는 양식을 위해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33, 34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떡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양식은 만나와는 달리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떡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것은 “주여 이런 물을 내게도 주사 여기 물 길러 오지 않게 하옵소서”하고 간청한 사마리아 수가 성의 여인의 말과 똑같습니다. 군중들도 “그런 떡을 항상 주십시오”하고 요청합니다. 35절 말씀을 주목해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썩는 양식이나 만나도 아닌 진짜 영생하게 하는 양식이 바로 나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에는 이와 비슷한 말들이 많이 기록돼 있습니다.

4장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생명의 물이다”고 하셨고 6장에서 “나는 생명의 떡이다”고 하셨습니다. 8장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 10장에서 “나는 양의 문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1장에서 주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고 하셨고 이어서 14장에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리고 15장에서는 “나는 포도나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놀라운 사실은 누구든지 2,000년 전에 33세에 죽은 청년 예수, 그분을 만나서 믿으면 인생이 배고프거나 목마르거나 허무하지 않습니다. 인생이 빛으로 가득하고 영원한 생명과 부활과 진리로 샘솟는 놀라움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기 어려운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에 망정이지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받아들이기가 무척 힘든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가 생명의 떡이다. 내가 너희의 음식이다”고 하십니다. “하루 세 끼 밥을 먹고 만나를 먹어도 죽지만 나를 먹으면, 나를 만나고 나를 믿으면 인생에서 놀라운 기적이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모든 사람들이 믿는 것은 아닙니다. 36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기적을 보인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믿는 게 아닙니다.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는다는 것과 믿지 않는다는 것은 인식의 문제, 감각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속에 믿지 않는 ‘오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싶은 불신앙, 인간의 교만, 자존심의 문제입니다.

‘진리’가 아니라서 믿지 않는 게 아닙니다. 참 진리라도 인간에게 믿지 않겠다는 마음이 있는데 이것을 ‘죄’라고 합니다. 꺾이기 싫은, 순종하기 싫은, 굴복하기 싫은, 끝까지 나를 고집하고 주장하며 이기려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불가항력적 은혜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예수님의 음성, 설교, 기적도 못 보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사람도 하나님께서 택하시면 모두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면 도망가고 욕을 하며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기도 합니다. 이슬람권에서는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형이 동생을 죽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시면 불가항력입니다. 3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불가항력 은혜’입니다. 불가항력은 은혜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거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옥까지 가서 택하신 자를 데려오십니다. 아무리 고집스럽게 거부해도 그분께서는 ‘은혜의 줄’로 동여매십니다. 주님께서 부르실 때 망설이지 말고 얼른 돌아오십시오. 인생의 반환점에서 머뭇거리지 마십시오. 속히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매를 대서라도 강제로 데려오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내어쫓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은혜 베푸시며 택한 사람들을 한 영혼도 놓치지 않고 ‘잃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은 한 사람도 지나치지 않고 온누리에 흩어져 있는 택하신 사람들을 모으십니다. 38, 39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영혼들은 예외 없이 모두 구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맞서지 말고 그대로 순종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결코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마지막까지 인간의 자유 의지로 거부한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시고야 말 것입니다.

그것은 부모가 자식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자식이 탕자와 같은 망나니라 하더라도 부모는 포기하지 못합니다. 자식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포기치 않는 사랑으로 주님은 마지막 날에 반드시 우리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40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선교사가 되어 복음을 들고 해외로 나갑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전도 종족’에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못하는 것은 복음을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기회나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원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전도하는 것은 나의 설득력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다가가서 “예수!”하고 말하면 믿을 사람은 믿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할 일은 “예수, 예수!”하고 입을 열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택함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옵니다. 선교지에 가서도 “예수, 예수!”하면 택한 사람은 믿게 돼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불가항력적인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택한 자녀를 결코 놓치지 않으십니다. 포기하시지 않고 반드시 구원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썩는 양식도 있고
만나도 있고
영생하는 양식도 있다는
말씀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양식이심을 믿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해
인생이 목마르지 않고
배고프지 않게 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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