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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설교 메세지

아브라함의 현실주의 / 창 14:13-16 / 옥한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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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현실주의/14:13-16/옥한흠 목사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다수인 불신자와 더불어 공존하여 살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잘못하면 미운 오리 새끼 신세가 되기 쉽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본문의 아브라함을 통해, 소수인 크리스천들이 다수인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기 위해 어떤 지혜를 가져야 하는지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소수자minority로서 성공한 아브라함

잘 아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갔습니다.

그 땅은 이미 여러 부족들이 선점하여 정착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곳에서 62년을 살고 난 다음에 한 말이 참 인상적입니다.

창세기 23:4절입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입니다.'

다시 말하면 떠돌이 신세라는 말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영적인 의미가 들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좀더 인간적인 측면에서 이 말을 생각해 본다면

아브라함이 여전히 그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다수의 부족 틈에 끼어 살기 때문에

여러 고충을 많이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가 필요 했습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수의 가나안 사람들, 이방인들 틈에 끼어 있었지만

그는 선민으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공했습니다.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본문을 통해서 세 가지로 정리를 해보려고 합니다.

이는 아브라함처럼 다수의 불신자들 틈에서 사는 소수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큰 교훈과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1. 아브라함은 부족들과 <좋은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동맹을 맺었던 아브라함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살고 있던 소돔성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 전쟁에서 소돔이 패배하자 그 성에 있던 모든 사람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물론 모든 재산도 다 빼앗겼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든지 조카를 구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준비하는 장면이 본문에 나옵니다. 그런데 13절에 재미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포로로 잡혀 간 조카를 건지기 위해서

누구하고 전략을 협의한 줄 아십니까?

바로 자기와 동맹한 마므레, 에스골, 아넬, 이 세 형제 부족들과 협의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그들과 동맹 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미 공동 협약도 동맹입니다. 유럽에는 나토 동맹이 있습니다.

서로가 안전과 평화를 위해서 공동보조를 맞추려고 정치적인 제휴를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가나안에 살면서 이 세 부족 족장들과 동맹을 맺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믿음의 사람이 불안해서 동맹을 맺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저는 처음에 그렇게 느꼈습니다.

'믿음의 사람답지 못하게 주변 부족들하고 동맹을 맺다니?'

 

아브라함은 얼마나 대단한 믿음의 사람입니까!

그가 메소포타미아에 살고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에게 직접 말씀 하시기를,

너는 네 친족, 네 고향을 떠나라. 그리고 내가 지시하는 가나안 땅으로 가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장차 그가 가서 살게 될 가나안 땅을 전부 소유하게 될 것을,

또한 그로 인해서 세계 모든 족속들이 복을 누리게 될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그의 후손에게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당당하게 가나안으로 왔는지 모릅니다.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해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거짓이 없습니다. 이 언약은 그대로 성취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철저한 보장을 받고 가나안 땅으로 왔으면

하나님만 잘 섬기고, 날마다 기도 생활만 열심히 하면 되지,

왜 이웃 부족들하고 동맹을 맺고 삽니까?

무엇이 겁이 나서 그렇게 하느냐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브라함의 믿음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너무 인간적이었다는 비판의 소지도 있을 수 있습니다.

 

신앙인도 현실적이어야!

그러나 저는 아브라함의 이 행동, 즉 이웃 부족과 동맹을 맺은 것이

그의 신앙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세상을 사는 지혜였습니다.

 

그가 비록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선민이었고,

오직 믿음으로만 살려고 노력하던 거룩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세상에 살고 있어야 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소수 민족으로서

외롭게 생존경쟁을 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가나안 불신자들과 더불어서 날마다 양을 치고 농사를 지어야 했습니다.

종종 그들과 어려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머리를 맞대고 의논도 해야 했습니다.

어떤 때는 신세를 지기도 하고, 신세를 갚기도 하고,

그러면서 우정을 쌓아 나갔습니다. 서로가 기대고 살 수 있는 언덕이 된 것입니다.

 

그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무엇을 책임져야 하고,

무엇을 희생해야 할 것인가를 늘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이지만 그들이 곤궁에 처할 때에는 그들을 도와야 했고,

자신이 어려움을 당할 때 어떻게 그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동맹>이라는 말 한 마디 속에 다 들어있는

아브라함의 현실주의’(처세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크리스천의 사회적 책임

우리는 비록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특별한 은총을 입은 자들이지만.. 그러나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가나안 부족들과 같이 살고 있습니다. 절대 다수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들과 어울려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협력해야 하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 됩니다.

또 그들이 필요로 할 때 언제든지 도움을 주고

그들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좋다고 해서 성도들끼리만 교회 안에서 지내는 것은

절대로 잘 하는 것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유대 관계를 제대로 맺을 수가 없습니다.

 

기억하세요. 내가 교회 안에서 무엇을 책임져야 될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동시에 내가 사회에서 무엇을 책임져야 할 것인가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양면이 다 있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참여해야

정치는 대개 안 믿는 사람들이 맡아서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그들과 협력할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됩니다.

교회 이름으로 정치 참여를 할 수는 없지만

여러분 개인적으로 시민운동이 펼치는 모든 캠페인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되면

개인적으로 기도하며 적극적인 동참을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정치하고는 관계가 없어. 정치를 가지고 왜 그렇게 떠드는가?

기도나 열심히 해!' 우리는 주변에서 이런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환경 보존에도 적극 참여해야!

환경 문제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최근에 신문을 통해서 자주 보셨겠지만

앞으로 10년 안에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최대의 이슈는 날씨라고 하지 않습니까?

미국의 다우 지수가 올라갈수록 환경 지수는 자꾸 떨어지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들이 점점 더 잘 살게 되고, 돈을 더 많이 벌수록

지구는 점점 더 망가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얼마나 어려운 위기에 처해 있는지 모릅니다.

앞으로 10년 사이에 날씨가 최대 이슈라면

어떤 재난이 우리에게 덮칠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이럴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안 믿는 다수인 불신자들과 연합해서

힘을 합하여 이 어려운 문제들을 극복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약해야 될 것은 다 함께 절약하고,

약품을 쓰지 않는 깨끗한 제품을 만들어야 되면 손해를 보더라도 그렇게 하고,

쓰레기를 분리 수거해야 되면 해야 하는 등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협력할 때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도 이전에 좋은 이웃되기

우리 교회의 대각성 전도 사역은 2월 달부터 시작해서 12월까지 계속됩니다.

대각성 전도 사역의 첫 번째 단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좋은 이웃 만들기캠페인입니다.

 

우리는 좋은 이웃을 만들기 위해서 먼저 협력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과 함께 손을 잡을 일이 있으면 손을 잡아야 합니다.

그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위하여 우리가 희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럴 때 좋은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길을 닦는 것입니다.

이런 협력을 위한 노력은 하지 아니하고,

갑자기 전도 집회 때 '교회 갑시다. 예수 믿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은,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좀 경솔한 태도가 아닌가 합니다.

 

12:18절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은 안 믿는 사람들을 포함합니다. 담을 헐라는 말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마음껏 다가올 수 있게 하고

우리도 그들에게 자유스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담을 헐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해서 이웃 부족들과 손도 안 잡고,

인사도 안 하고, 홀로 유아독존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교회 안에서만 맴돌고, 세상 사람에게는 관심도 없고,

이웃에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있어도 흥미도 없는 분들이 혹시 계십니까?

 

항상 '집사님, 권사님'을 입에 달고 다녀서

사람만 만나면 자기도 모르게 '집사'가 나오는 식으로 한 쪽으로 치우치지 마세요.

그러면 안 됩니다. 협력해야 합니다. 문을 열어야 합니다. 담을 헐어야 합니다.

 

2. 아브라함은 <평소에 힘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도 사병을 양성했습니다.

14:14절에 재미있는 내용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포로로 잡혀간 조카 롯을 구원하기 위해서 행동에 옮겨야 될 상황인데,

참 놀라운 것은, 그가 평소에 자기 집에서 사병을 키우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318명이라는 군사가 있었습니다.

 

평소에 칼을 쓰는 법을 가르치고, 활을 쏘는 법을 가르치고,

전투하는 법을 가르쳐서 대비를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318명이라면 별로 숫자가 많지 않다는 느낌이 들지만

한 가정에 이 정도의 사병을 키운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와 같은 태도를 보면 역시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믿음과 모순 되는 행동 같이 보입니다.

'하나님이 지켜 주시는데 왜 사병을 키우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욱이 가나안으로 아브라함을 보내시면서

'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저주를 받을 것이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철저하게 보호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누구든지 너에게 와서 너를 다치게 하면 내가 가만히 안 두겠다'고 할 정도의

언질을 받고서 가나안에 온 사람이, 왜 자기 집에 사병을 양성하고 있습니까?

'무엇이 못 미더워서 그랬던 것일까?'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십니다.

어려울 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기가 해야 할 책임은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의 지혜를 총동원하여 자기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자기 자신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힘을 키우며 살았습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힘이 필요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힘을 가져야 남보다 앞설 수 있고, 힘을 가져야 불행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힘을 가져야 내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수 있고,

힘을 가져야 만이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힘이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힘을 키우는 데는 상당한 노력과 투자와 희생이 따릅니다. 기도만 가지고 안 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이라도

자기가 노력을 하지 않으면 힘이 생기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투자하지 않으면 남다른 힘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믿음이 대신 해 주는 것 아닙니다.

 

봄날 파종기가 되어 많은 농부들이 씨를 뿌릴 때,

날마다 앉아서 기도만 한다고 합시다. 그 기도가 씨를 뿌려 줍니까?

절대 뿌려 주지 않습니다. 자기가 나가서 직접 뿌려야 됩니다.

남이 한창 추수를 하고 있을 때 성경 공부만 한다고 해서

성경공부가 추수를 해 줍니까? 안 해 줍니다. 자기가 가서 직접 추수해야 됩니다.

땀 흘려야 됩니다.

 

예수를 잘 믿는 많은 분들 가운데 미신적인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상당 수 있습니다.

무엇이 미신적인 생각입니까?

'기도만 하면 된다.' 반은 성경적이고 반은 미신적입니다.

 

신앙생활만 잘 하면 하나님이 다 해주신다. 걱정하지 마!'

반은 성경적이고 반은 미신적입니다. 이 말을 잘 이해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져야 할 책임을, 천사를 보내어 대신해 지게 해 주시는 일은,

특별한 상황이 아니고는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를 원합니까? 사회에 영향을 끼치기를 원합니까?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기를 원합니까?

또 이 사회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힘을 키워야 됩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부탁하고 싶습니다.

각자가 받은 달란트대로 최선을 다해서 힘을 키우십시오.

날마다 교회 마당에서 서성거리지 마십시오.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영어를 공부하고, 자기 전공분야의 실력을 키우시기 바랍니다.

 

요즘 저는 도올 김용옥 교수가 쓴 '노자 이야기'라는 책을 읽어 보았습니다.

EBS에서 노자 강의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관심을 많이 가지는 것 같습니다.

어느 분야든 힘을 가진 사람이 등장하면 엄청난 파장을 일으킵니다.

 

그의 기독교 비판은 도가 지나쳐서 비판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 만에 하나 들어 둘 만한 이야기들이 있으면, 들어야 합니다.

 

제 소망은, 우리 젊은이들 가운데,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만한 정도의, 또는 그 이상의 탁월한 실력을 갖추고서

안 믿는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좋은 점, 성경의 좋은 점,

예수 믿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덕을 매력 있게 전달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까? 만약에 그런 사람들이 지금 없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까?'

하는 걱정입니다.

힘을 키우라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제가 한 가지 예(도올)를 든 것뿐입니다.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 잠24:5

우리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영향을 끼치려면.. 힘을 키워야 합니다.

 

3. 아브라함은 자신이 <무엇이 다른가를 분명하게 보여 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1. 남의 이익은 철저히 챙겨주고

아브라함이 소돔성에 있는 백성들과 자기 조카를 다 구출하고

많은 전리품을 끌고 왔습니다.

소돔 왕이 자기 대신 복수를 해 준 아브라함에게 너무 감사해서

아브라함이 얻은 전리품을 전부 가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브라함이 아주 의미 있는 말을 합니다. 23절입니다.

네 말이 내가 아브라함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릇 한 실이나 신들매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겠다. 14:23

 

축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 인해서 사는 사람이지,

그들에게 손을 벌리면서 살 사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 한 타래라도, 신발짝 하나라도 안 가지고 갈 것이며

소돔왕의 것은 다 도로 가져가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는지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어떤 교훈을 얻습니까?

아브라함은 자신이 어디서 다른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자기 이익은 거절함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수십 년을 살았으면서도

매장지로 쓸 만한 땅 한 평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죽었는데 장사할 땅이 없습니다. 그래서 헷 족속에게 찾아가 사정을 합니다.

'내 아내를 장사하려고 하는데 땅이 없다. 너희들이 소유하고 있는 막벨라 굴을

나에게 팔아라. 그러면 내가 그것을 사서 내 아내를 거기에 장사 지내도록 하겠다.'

 

헷 족속 가운데 막벨라 굴의 소유주가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이시여, 두 말 하지 말고 그 굴을 가지십시오. 제가 거저 주겠습니다.

굴 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 있는 수목까지 전부 다 당신에게 거저 줄 테니

당신이 소유하시고 거기에 죽은 자를 장사하십시오.'

 

이 정도 되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 것 같습니까?

그러면 '감사합니다' 하면서 못 이기는 척 하고 받아 들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안 믿는 사람들의 심리를 꿰뚫어 보았습니다.

면전에서는 '거저 가지십시오. 괜찮습니다.'라고 해놓고는

나중에 가서 뒷말을 한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선민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복을 가지고 살아야 되고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 땅 전부를 자기 자손에게 준다는 약속을 믿는 사람인데,

남에게 공짜로 땅 얻어서 뒷말을 듣습니까?

그는 절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안 받겠다는 것을 억지로 그 당시 시세를 쳐서 은 4백 세겔을 주고

그 땅을 사서 소유하고 장례식을 했습니다.

 

구별된 삶으로 존경을 받았던 아브라함

세상에 살면서 염치없는 사람처럼 보이게 되면

우리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돈에 있어서 항상 흐릿한 행동을 하면 절대로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속에 감추고 있는 욕심을 은근히 드러내는 언동을 하면 절대 감동을 못 줍니다.

아브라함처럼 분명해야 됩니다.

 

우리의 생명, 우리의 성공, 우리의 부귀, 우리의 형통,

우리의 남은 미래는 전적으로 누구에게 달려 있습니까?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구질구질하게 아부하거나 사람들에게 손 내밀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자세를 지켰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돈을 많이 가졌다고 해서

세상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돈을 많이 가질수록 망신당하기가 더 쉽습니다.

'돈을 그렇게 많이 가졌는데 왜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쓰지 않소?' 하면

망신당하고 끝나는 것입니다.

 

권력을 갖고 있다고 세상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만한 권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 부패한 정치계하나 바꾸지 못하고

왜 그렇게 자기 혼자만 호의호식 합니까?' 하면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당당함과 청렴함을 보여 주면,

예의 바른 자세를 보여 주면,

욕심이 없는 투명한 자세를 보여 주면.. 세상 사람들은 감동을 받습니다.

 

'분명히 우리 하고는 다르다. 분명히 다르다.'

이렇게 느낄 때 그들의 마음에서 존경심이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런 행동으로 처신을 하기 때문에

그 가나안 땅에 있는 사람이 아브라함을 어떻게 대우했습니까?

'당신은 우리 중에 하나님의 방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지도자입니다.' 23:6

라고 그들이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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