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고전 4:14-21 / 영적 아버지 / 이동원 목사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아버지는 없고 아빠만 있다'는 말이 공감대를 넓혀가고 있습니다. 과거 집안의 어른이요 권위의 상징인 아버지는 간데 없고, 친구와 같이 존재요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인 아빠만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과거 아버지와 자식간의 관계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과거 아버지와 자식간의 관계는 수직적인 관계였는데 지금은 이것이 수평적인 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빠 우리 놀러 안가?" "그래 놀러 가야지..." 요사이 아버지와 자녀들이 대화할 때 흔히 볼 수 있는 말투입니다. '아버님'은 고사하고 '아버지'란 호칭도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대충 반말조입니다. 이걸 나무라는 아버지도 이것이 잘못됐다고 느끼는 자녀들도 없습니다.
가족들이 야외로 놀러 가려고 의견을 모읍니다. 과거라면 아버지가 산으로 가지고 하면 무조건 산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잘 통하지 않습니다. 그걸 기대하는 아버지가 아직도 있다면 간 큰 아버지일겁니다.
자녀들의 주장에 거세졌습니다. 정 의견이 통일이 되지 않으면 '투표'하자고 덤벼듭니다. 투표라뇨! 언뜻 들으면 민주적이라 좋고 멋있어 보이지만, 알고 보면 기막힌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도 한 표, 자녀들도 한 표.. 너도 한 표 나도 한 표이니 아버지의 권위는 온데 간데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와 자녀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되어야 할까요?
물론 과거처럼 수직적인 관계로 돌아가서는 안됩니다. 아버지 상이 억압형이거나 학대형이거나 과잉 통제형일 경우 오늘과 같은 시대에 자칫 부자관계가 영영 깨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요사이 흔히 볼 수 있는 지나친 수평적 관계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권위를 잃어버리게 되면 자녀 교육이 어렵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람직한 아버지와 자녀 사이의 관계는 수직적 관계와 수평적 관계가 적절하게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아버지와 자녀가 터놓고 대화도 하고 때로 친구처럼 가까운 정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자녀의 잘못을 바로 잡아주고 자녀가 미래를 준비하는 일에 책임 있게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아버지와 자녀 관계가 수평적이고 수직적으로 조화와 균형을 잡게 될 때 자녀들이 건강하고 훌륭한 인격으로 성숙한 한 인간으로 자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 시대에 아버지가 제 자리를 되찾아야 합니다. 오늘 많은 가정의 문제, 그리고 나아가 사회 문제는 집안에 어른으로서 아버지가 제자리를 잃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에 아버지 같은 권위 있는 어른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아직 믿음이 어린 사람들을 따뜻하게 사랑으로 이끌어주고 배려해 주는 영적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아직 믿음이 어린 사람들을 타이르고 권면하고 때로 훈계도 할 수 있는 영적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이런 영적 아버지 밑에서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이 배출됩니다. 하나님께서 귀히 쓰실 큰 일꾼들이 자라납니다.
우린 오늘 본문에서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고린도 전후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네 번이나 편지를 썼던 것 같습니다. 그 중에 두 개만 남아서 성경에 수록되었는데 고린도 전서가 두 번째 편지입니다. 그리고 고린도 후서가 네 번째 편지입니다.
특별히 고린도 전서에는 고린도 교회의 영적 아버지의 모습이 전체적으로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 말씀 안에는 영적 아버지의 두 가지 모습 즉 수평적인 모습과 수직적인 모습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우선 수평적 관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자상한 아버지 다시 말해서 사랑스런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아버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15절을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상황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바울서신을 자세히 살펴보면 당시 떠돌이 성경교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대개 예루살렘 교회나 먼저 세워져서 앞서 발전하고 있던 동방의 교회 출신들입니다. 이들이 소아시아나 유럽 지역의 신생 교회들을 찾아다니면서 성경을 가르치고 기독교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많은 경우 오히려 교회에 큰 혼란과 분열을 초래했습니다. 대표적으로 갈라디아 교회라든지 오늘 본문의 교회인 고린도 교회에서 그랬습니다.
혼란과 분열이 생긴 이유가 이들이 바울이라든지 그곳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말씀을 전한 초창기 선교사들의 가르침을 비판하거나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점도 큰 문제입니다. 남이 땀흘려 복음을 전해서 교회를 세워놓은 곳에 와서 그 가르침이 잘못됐고, 자기가 가르치는 것이 옳다고 해 놓으니 교회에 얼마나 큰 혼란이 생기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더 큰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점이 보다 근원적인 문제일 것입니다. 바로 그들이 교회를 섬기는 자세 또는 태도의 문제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스승의 자세, 스승의 태도라고 했습니다.
우리 생각에 스승의 태도로 교회에 와서 가르친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스승이라는 말은 우리 문화권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다른 개념입니다.
우리 성경에 스승이라고 번역된 말은 본문 원어에는 '파이다고고스(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오늘의 교사나 우리 동양문화권의 훈장 또는 스승과는 다른 의미의 말입니다. 당시 헬라 문화권에서 '파이다고고스'는 대개는 노예들이었습니다. 노예 중에 지식이 있고 아이들을 돌볼만한 사람들이 이 일을 맡았습니다. 때론 마을의 학식이 있는 사람들이 맡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대가를 받고 아이들을 돌봐주고 기본적이고 필요한 지식을 얻도록 도와주는 정도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요즘 말로 가정교사 또는 과외교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시는 대로 가정교사는 아이들의 장래에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그저 일정 기간 동안 아이들을 지도하고 그 대가를 받을 뿐입니다.
당시의 성경교사들이 이런 자세로 교회에서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서 바울은 자기 자신은 스승이 아닌 아비로 고린도 교회에서 섬기고 봉사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무엇입니까? 아버지는 자식의 장래를 진심으로 염려합니다. 그리고 자식의 양육에 전적으로 책임을 집니다. 자식을 바로 키우는 일에 혼신을 기울입니다. 바울은 이런 자세로 고린도 교회를 섬기고 봉사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아버지들이 이런 자세를 되찾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의 영적 아버지들이 이른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집안의 자식들, 교회 안에 아직 영적으로 어린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대할 때 이 아버지 의식이 필요합니다.
둘째로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본문 15절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말씀했습니다.
정말 바울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 때문에 고린도 교회가 세워졌고, 고린도 교인들 대부분이 믿음을 가지게 됐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와서 복음을 전한 것은 2차 선교 여행중인 주후 50-51년경 겨울부터였습니다. 이례적으로 이곳에서 바울은 1년 반정도 머물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는 홀로 이곳에 와서 당시 천막 사업을 했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집에 취직하여 자기 손으로 밥벌이를 해 가면서 유대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나중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후원자로 도왔고, 후에 실라와 디모데가 마케도니아로부터 내려와서 바울의 선교 사역을 도왔지만 그렇게 쉬운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유대인들의 조직적이고 치밀한 방해와 박해 때문에 그는 너무도 힘든 시절을 보냈습니다.
이런 고달픈 시절을 본문 11-13절에서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고린도 교회 초창기에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는지 말해 주는 대목입니다. 바울은 이것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갈 4:19에 해산하는 수고라고까지 말했습니다. 마치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 겪는 그 고통처럼 고린도 교회를 개척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너무도 힘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입니다. 자식들을 위해 수고하고 땀흘리고 애태우고... 그저 낳아놓았다고 다 아버지가 아닙니다. 자식을 위해 수고하고 땀흘려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식을 위해 헌신할 때 그 사람이 아버지입니다. '네 인생은 네 인생이고 내 인생은 내 인생이다.' 몰라라하고 돌보지 않고 수고하지 않는 사람은 아버지가 아닙니다.
오늘의 아버지들이 이런 태도를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양육의 책임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여기에도 헌신이 필요합니다. 우리 영적 아버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양육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새신자들 믿음이 어린 사람들 그들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훈계하는 아버지
다음으로 수직적 관계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훈계하고 야단치는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책망하고 있습니다.
본문 14을 보면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말씀했습니다. 사실 본문 앞부분을 보면 바울은 정말 강한 어조로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했습니다. 이 말씀은 조금 그 어조를 낮추고 있는 것입니다. 어조를 낮추긴 해도 여전히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실 고린도 교인들이 크게 잘못하고 있는 것들이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서로 분파를 만들었고 그리고 서로 싸우고 다툰 것입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이 1년 반 목회하다가 떠난 자리에 아볼로가 방문을 했습니다. 그는 놀라운 언변과 성경해석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행 18장을 보면 알레고리 해석의 본고장인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아볼로는 지금까지 듣지 못하던 방식의 성경해석으로 고린도 교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를 자신들의 선생으로 받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베드로가 이 지역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도들과 비교해 볼 때 율법의계율을 철저하게 가르치고 보다 금욕적인 입장을 보였습니다. 금욕적 성향의 많은 고린도 교인들이 또한 베드로를 자기들의 사도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 두 그룹에 대항하며 원래 자신들의 사도인 바울에게 충성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힘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극단적인 열광주의자들이 자기들은 영적으로 직접 그리스도와 교통한다면서 자기들의 스승은 그리스도뿐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 안에는 아볼로파, 베드로파, 바울파, 그리고 그리스도파 이렇게 네 분파가 생겨서 서로 심하게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더 이상 이 문제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21절에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말씀했습니다. 결단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만일 고린도 교인들이 계속 시기와 분쟁을 일삼는다면 매를 들고 갈 것이라고 야단을 치는 것입니다.
오늘의 아버지들도 매를 들어야 합니다. 야단칠 것은 야단칠 수 있어야 합니다. 요즘 아버지들은 매를 잃어버렸습니다. 특히 신세대 아버지들은 자식들에게 끌려 다닙니다. 쩔쩔 맵니다. 자녀들이 잘못을 저질로도 매를 들 줄 모르고 야단칠 줄을 모릅니다. 권위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매를 드는 것하고, 감정을 폭발하는 것하고는 다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매는 자녀들이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고 그 매를 달게 맞을 때 드는 매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녀들을 위해서 자녀들을 정말 아끼는 마음으로 드는 사랑의 매를 말합니다. 자녀들이 '아버지는 괜히 야단이야...' 반발을 한다든지 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맞기는 맞는 그런 매를 말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아버지들은 사랑의 매를 들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영적 어른들은 젊은 세대가 잘못할 때 사랑의 매를 들어야 합니다. 아직 영적으로 어린 사람들을 이끌고 지도할 때 사랑의 매를 들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본을 보였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에서 바울은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 되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나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남들에게 본이 될만하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4:4에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자칫 교만이라고 볼 수 있겠으나 그 만큼 영적 자녀들 앞에서 자기 관리를 철저하게 했음을 말한다.
오늘의 아버지들이 권위를 잃게 된 결정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는 자녀들의 본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닷가에 게들이 살고 있습니다. 아비 게가 자기들만 옆으로 걷는 것을 늘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식들만큼은 곧바로 걷도록 가르칩니다. 힘들지만 자기가 앞 장 서서 이렇게 하라고 시범을 보입니다. 자식들이 어렵사리 따라옵니다.
그런데 저쪽에서 게를 잡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너무 놀란 아비 게가 원래대로 옆으로 도망쳤습니다. 물론 새끼 게들도 모두 다 옆으로 걸어서 도망쳤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아비 게는 다시는 자식들에게 옆으로 걸으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 우화처럼 오늘의 아버지들이 자식들 앞에 체면이 말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생활이 엉망인데 나는 이렇게 살아도 너는 저렇게 살아라 말한다면 그 말은 씨가 먹히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자식들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식들을 훈계할 수 있습니다.
영적 아버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이 되야 합니다. 교회의 어른들은 젊은 세대들 앞에 부끄럽지 않아야 합니다. 이제 믿기 시작한 사람들 앞에 본이 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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