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이사야 43:1-7
제목 : 영적 자부심
찬송 : 263 이 세상 험하고, 488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사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 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사 43: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사 43:4)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사 43:5)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사 43:6)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사 43: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서론
해병대 자부심
군인들에게 있어서 자부심 하면,,, 해병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병대를 나온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한다고 합니다.
'누구나 해병을 선택했다면, 나는 해병대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자부심이 강하도록 훈련 받아서 그렇겠죠?
해병대의 자부심이 높은 이유?
징병제가 아닌 지원제, 강하게 교육받는 것, 힘든 훈련 속에 전우애가 쌓인 관계, 해병끼리 통하는 그~ 느낌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저는 해병대가 아닙니다.
전 군 생활을 교도소에서 했습니다. 경비교도대였습니다.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해병대처럼 육군에 지원했습니다.
국방부에서 절 싫어했는지 법무부 소속으로 차출시켜서 교도소를 지키라고 경비교도대로 보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7사단, 백골부대, 수색대 같은 곳에서 군 시절을 보내고 싶었는데
2년 2개월 동안 의정부 교도소를 지켰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원래 빽이 있어야 들어가는 곳입니다.
훈련은 적고 근무가 많으며, 시간을 내서 공부하면 충분히 공부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울한 교도소 환경이었지만, 짝대기 두 개 달기 전 때부터 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군대는 하나님의 준비가 이루어진 시간이라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2년 2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정말 많은 책을 읽었고, 찬양을 위한 노래 연습이 이루어진 준비된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말 고삐 풀린 망아지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안들리는지, 선지자의 메세지에 무슨 반발감이 드는지 사춘기 청소년 같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깨닫지 못했어요. 또한 그런 상황에 전혀 반응하지 못한 모습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첫 시작부터가 다릅니다.
한글 성경에는 표현되지 않았지만, 원어 성경에는 ‘그러나 이제‘라는 단어로 이사야 43장이 시작합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모르는 망나니 같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새로운 날이 임박했다고 말씀하십니다.
회복의 날, 구속의 날, 변화의 날이 온 것입니다.
새로운 티핑 포인트, 곧 점핑할 때가 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져야 할 마음은 무엇일까요?
구원의 날, 영광의 날, 회복의 날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이런 존재라는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버려진 존재가 아닙니다. 잊혀졌던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끊어진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또한 영적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부실을 말이죠.
본문을 통해서 세 가지 정도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는
1. 영적 자부심의 프레임을 만들어야 합니다.
프레임이라고 하는 것은 틀을 말합니다. 유리창 틀, 생각의 틀, 구조의 틀 등 여러가지 틀을 말합니다.
신앙에도 영적 자부심이라는 프레임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코로나에 흔들리고, 메르스에 흔들리고, 핍박에 흔들리고, 여러가지 힘든 환경 때문에 흔들립니다.
나중에는 뿌리까지 뽑히게 되는 것입니다.
프레임이 있으면 견고해집니다. 그리고 일어나는 모든 상황은 나의 경험이 됩니다.
곧 배움이 되는 것이에요.
신앙생활의 모든 경험들은 배움의 기회,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기회, 믿음이 단단해지는 기회가 된다는 것이에요.
나는 왜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가 라는 생각에 빠지기보다
믿음의 프레임이 더 강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을거야.
나는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이기 때문에 나를 늘 보호해주실거야. 라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지 본문 1절을 읽겠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
(사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너는 내 것이라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셨습니다.
나를 지으셨고, 그분이 나를 부르셨고, 나의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나를 구속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속자란 가족 중에 빚을 갚지 못해 노예로 팔려간 사람을 구해주는 것을 말해요.
자기 돈으로 속전을 지불하고 노예 된 가족을 해방시켜 데려오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시는 구체적인 행동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 43: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이스라엘을 다시 찾아오기 위해서 애굽을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속전으로 지불하여 이스라엘을 해방시켰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기 위해 대가를 하나님께서 치르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속의 옷을 입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나를 향한 프레임입니다.
7절에도 보시면,
(사 43: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이스라엘을 지으신 이가 동일하게 반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야곱아 내가 너를 창조하신 분이다.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빚으신 분이다.
내가 너를 창조하였고, 내가 빚었고, 내가 만들었다.
저희 중에서 그 누구도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없을 거예요.
혼자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엄마 뱃속에서 10개월 동안 엄마 영양분을 공급받으며 자랐고, 만들어졌습니다.
보호 받고, 사랑 받고, 이쁨 받고,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태아를 위해서 잘 먹던 사이다도, 커피도 먹지 않았습니다. 태아에게 나쁘다는 것은 다 끊었어요.
그렇게 우리 모두는 엄마의 품 속에서 자랐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우리를 그렇게 지으셨고, 만드셨고, 모든 값을 치르셨습니다.
한 영혼을 위해서 말이죠. 그 한 영혼이 바로 나 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영적 자부심의 프레임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종교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고, 내 것이라 말하고, 내가 너를 만들었고, 내가 너를 보호해주겠다고 말합니까?
누가 이렇게 사랑해주나요? 누가 이렇게 보호해주고 관심을 가져주나요?
우리 하나님이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붙잡아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가 영적 자부심의 프레임을 갖기를 축복합니다.
2. 영적 자부심은 하나님의 가치를 드러냅니다.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사 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이 말씀은 5,6절과 짝을 이룹니다.
(사 43:5)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사 43:6)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지닌 가치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속량하는 일에 치루는 어떤 대가도 아깝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 가치가 상상 못할 정도로 너무나 값집니다.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않고,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한다고 말합니다.
어느 민족도, 어떤 백성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집어 삼킬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을 예로 들면 이렇습니다.
유대인은 세계 인구의 0.25%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노벨상 전체 수상자의 27%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세계 100대 기업의 40%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가치처럼, 자녀를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들의 소유물로 절대 여기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13세가 되면, 성인식을 치루는데, 토라(모세오경) 중 1가지를 선택해서 암송합니다.
말씀을 외우면서 무엇을 생각할까요?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나의 가치를 알면 그 누구도 나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가치를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높이 여깁니다.
내가 나의 가치를 낮게 여기는 거에요. 나의 가치를 바닥까지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전 국가대표 축구선수 이영표는 ‘골때리는 그녀들’ 프로그램에서
자신이 토트넘에 입단했을 때
‘축구선수로서 어떻게 슬럼프 없이 승승장구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기자의 질문을 받고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영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했던 경기가 몇 번 있었는데 그 몇 번의 경기를 패배하고 또 패배했다고 합니다. 그때마다 자책했던 기억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그는 자책 속에서도 실패에 무너지지 않았을까요?
‘왜 사람들은 나를 슬럼프 없는 성공한 선수로 기억할까요?’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책은 할 수 있어도 실패가 자신을 실패시키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것이 이영표의 가치입니다.
이영표에게는 다른 사람이 모르는 자신만의 프레임이 있었던 것입니다. 패배하고 패배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프레임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실패가 자신을 실패시키지 못한 거에요.
우리에게 이러한 스스로를 높이는 가치가 있기를 원합니다.
나의 가치를 깨닫는 영적 자부심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 내가 물을 지날 때에 나와 함께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불을 지날 때에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렇게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고백이 나의 입술에 증거가 되도록, 나의 가슴에 새겨지도록 반복되어야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이런 말씀을 받았습니다.
출 3: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모세는 힘들 때 이 말씀을 계속 기억하지 않았을까요?
수백번, 수천번을 되새겼을 거에요. 고백하고 또 고백했을 것입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라고 말이죠.
우리의 뇌는 참으로 신기해요.
뇌는 변화를 싫어합니다. 익숙해진 것을 좋아하지, 선한 것을 위해 변하려고 하면 거부반응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셔" 라고 말하면, 뇌는 우리 생각과 마음에 이렇게 신호를 보냅니다.
아니야. 너의 그 추한 모습 속에 어떻게 함께 하시니.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셔" 라고 말하면, 너를 어떻게 사랑하니?
"나는 할 수 있어" 라고 말하면, 너 정말 할 수 있니? 안돼잖아? 라고 생각이 듭니다.
뇌가 인정하기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을 때까지,
나의 가치는 하나님께서 정해주셨다는 것을 반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의 가치를 정해주셨으니,
이제 내 자신 스스로의 나의 가치를 세우면 되는 것입니다.
현대 화가 이중섭은 39살의 짧은 삶을 끝으로 슬픈 세상과 이별했습니다.
그는 6·25전쟁 당시 부산 피난 시절 부두 막노동을 하며 그림을 그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조차 건강 문제로 여의치 않게 되자 그림 그릴 종이 한 장도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당시 담뱃갑에 들어있던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쓸모없이 버려진 폐지가 이중섭이라는 화가 손에 담겨지니 예술이 되고 작품이 된 것입니다. 지금은 은박지 작품 3점이 뉴욕현대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쓰레기의 운명이 이렇게까지 바뀌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손이 나에게 닿는 순간 우리는 귀한 걸작품이 되었습니다.
믿으십니까?
우리 모두가 주님 안에서 이러한 영적 자부심을 갖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3. 영적 자부심은 사랑 관계에서 생깁니다.
본문 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사 43:4)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본문에 대해 잠깐 설명드리자면, 1-7절은 대칭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대칭 구조는 1절과 7절, 2절과 5,6절, 3절과 4절 후반부, 4절 첫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4절 첫 부분에 나온 “내가 너를 사랑한다”가 핵심입니다.
“내가!!!!”사랑하는 것입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내 눈에 너가 보배롭고 존귀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누가 여기에 토를 달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계를 말하고 있어요.
꼭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의 관계,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맺은 관계의 끈은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 거예요.
부모의 이미지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녀로 여기는 모습이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1절에 내가 너를 이름으로(지명하여) 불렀다. 너는 내 것이다
2절에 물 가운데 지나도, 불 가운데 지나도 함께 할 것이다.
3절에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다.
4절에 너는 보배롭고 존귀하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5절에 두려워하지 말라
6절에 내 아들들, 내 딸들
7절에 내가 그를 지었고, 내가 만들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부모와 자녀 사이임을 은연 중 내비치고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내 아들아~ 내 딸아~ 라고 말하는 부모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을 상상해 보세요.
6절에서 내 아들과 내 딸이라 부르는 부모의 이미지가 반복되어 부각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런 분위기는 이스라엘에게 가까이 다가가시는 하나님의 발걸음과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모습이 우리와 가장 가까운 관계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 중에서도 “내 아들... 내 딸”이라고 부르는 모습에서 절정이 느껴집니다.
이런 사랑 관계는 끝까지 계속되는 관계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단절될 수 없는 사랑이에요.
이러한 사랑을 받는 사람은 세상 앞에서 가장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예화)
고등학생 시절 시험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저의 인생의 모토는 늘 열심히 하자! 이기 때문에, 그때도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시험 앞두고 벼락치기 공부를 하잖아요? 그날은 3과목을 시험 보는 날인데, 한 과목을 다 끝내고, 또 한 과목을 끝내고 마지막 과목은 세계사였습니다. 그런데, 너무 피곤했습니다. 몸이 지칠 때로 지쳐서 그런지... 잠시 잠깐만, 딱 10분만 자고 일어나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잠을 잤습니다.
잠깐 잤는데, 일어나보니 아침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험 공부도 못한 채 시험을 봤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아는 문제가 거의 없습니다. 객관식은 찍었고, 주관식은 쓰지도 못했습니다.
시험을 마치고 점수를 체크하는데 비내리는 호남선입니다. 굻은 빗줄기가 내려옵니다.
결국 저는 저의 인생에 있어서 오점을 남겼습니다.
그때 평균점수 엄청 떨어져서 담임선생님께 매를 10대나 맞았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다르게 반응하셨습니다.
"다음에 잘하면 돼지" 라고요.
괜찮다는 거예요. 그것이 부모 자식 간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거예요.
공부 못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건강하게만 커달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때 엄청 위로를 받았습니다.
실패는 사랑의 관계의 끈을 절대로 끊지 못합니다.
오늘 말씀처럼 성경에는
"내가 너를" 이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내가 너를 택하고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내가 너를 이가 날카로운 타작기로 삼으리니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내가 너를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고 네 자녀를 내가 구원할 것임이라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음이라
내가 너를 위하여...
내가 너를 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오죠?
하나님께서 먼저 보여주시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의 관계는 일방이 아닌 쌍방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역시 '서로를 향한' 사랑으로 온전히 채워져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고백이 바뀌어야 합니다.
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굳세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구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저도 사랑해요. 라고 말이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자존감이 저절로 올라갑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 이겨낼 힘도 있습니다.
(예화)
이동국 선수는 1998년 프랑스월드컵 네덜란드전에서 혜성처럼 등장했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주전 선수로 뛸 줄 알았는데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됩니다.
4년 뒤에, 열심히 노력하여 월드컵 본선 무대에 오르게 되었는데, 불과 2개월 남겨두고 무릎 부상을 당합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미들즈브러에 진출하지만,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기회를 잡지 못했던 안타까운 순간들이 있었지만 그는 다시 일어섰습니다. 가족들의 사랑과 그를 아끼는 사람들의 용기의 메시지, 사랑의 메시지로 다시 도전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나를 세울 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서 영적 자부심을 갖게 만듭니다.
이제는,,, 자신을 그만 깎아내리고 영적 자부심으로 세워지길 원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결론>
자부심이란 누군가가 이룰 수 없는 일을 이루었을 때 자신에게 주어지는 마음, 자신을 세워주는 마음입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다시 뛸 수 있는 용기가 생기는 것이 자부심입니다.
나를 인정해주시고, 나의 이름을 불러주시고, 나를 사랑해주시는 주님 때문에 내가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주님 때문에 힘을 다해 뛸 수 있는 것이고,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나 자신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살면, 내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다르게 여겨질 줄로 믿습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영적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는 축복된 인생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 : 나의 안에 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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