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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설교 메세지

[설교] 왜 사느냐고 물으면? / 빌 1:19-26 / 유기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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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느냐고 물으면? /1:19-26/ 유기성 목사

 

오늘은 설교하기가 좀 조심스럽습니다. 중학교 때 아버지가 목사라고 하니 친구들이 질문을 하였습니다.“천국이 있다며? 그러면 죽는 것이 좋겠네?”그 때는 제대로 답을 못했습니다. 솔직히 당황했습니다.

 

죽는 것은 가장 불행하고 두려운 것인데, 죽는 것이 좋다니 말도 안되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도하기가 두려웠습니다. ‘당장 죽어도 좋겠냐?’는 질문에 대답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천국이 있느니 죽는 것도 좋으냐?”하면 그렇다고 답을 할 것입니다. 천국이 있다고 믿으면서도 죽는 것은 두렵다는 것은 교리로만 믿기 때문입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교인 가정에 있있던 장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가 되어 임종을 지키려고 가족들이 둘러 앉았는데, 어머님이 숨을 거두시지 못하고 애를 쓰시는 것을 보면서 큰 며느리가 옆에서 하지 말았으면 좋을 말을 했답니다.

 

어머니! 이제 천국 가시게 되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거기 아버님도 계시고 친구 분들도 계세요, 거기는 눈물도 고통도 아픔도 없어서, 언제나 좋은 시간만 보낼 수 있으시니까, 어머니, 얼마나 좋으세요?”

 

성경에 있는 대로 말했습니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시어머니에게는 며느리의 말이빨리 죽으라.”는 말로 들렸습니다. 시어머니가 눈을 감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좋은 데를 나 혼자 가니 미안하다. 같이 가자.”순간 며느리가 당황스러워 어머니, 아이들이 있잖아요. 어머니 손자이잖아요. 그 아이들에게는 아직 제가 있어야 되요!”

 

그랬더니그 놈들도 다 데리고 가자.”그래서 임종 순간이 온 가족들에게 썰렁하게 되었답니다. 시어머니도 며느리도 다 천국을 믿지만 죽음의 두려움이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 해도 교리적으로만 믿으면 행함이 따르지 않는 죽은 믿음이 됩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속죄함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속죄의 교리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으면서도 염려가 사라지지 않고 은밀한 죄를 이기지 못하는 것도 교리로만 믿었기 때문입니다. 교리로만 믿으면 천국 소망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죽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예수님을 알고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죽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했습니다.

 

21절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23절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

 

이런 믿음을 천국 소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죽고 난 다음에 영혼이 가는 천국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스데반도 보았고, 사도 바울도 직접 가 보았고, 히브리서 기자도 천국에 간 많은 성도들이 우리를 지켜 보고 있다고 했고, 요한계시록 21장에 자세히 묘사되어 나옵니다. 에녹은 천국에 들려 올라갔고, 에스겔도 보았습니다. 이사야도 보았습니다.

 

무엇 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천국을 보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의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천국 소망을 가진 자에게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표징은 기쁨입니다.예수님께서는 천국을 소유한 자의 기쁨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보화를 발견한 농부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천국을 소유한 자는 이렇게 기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으면서도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한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보화를 발견한 농부의 기쁨을 가졌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죽음 앞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이 구원받은 모든 성도인 것입니다.

 

김활란 박사는 자신의 장례식에서 장송곡 대신 행진곡을 연주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길선주 목사님은 임종 때 그를 둘러서 있는 사람들을 향해하늘에서 전보가 왔으니 이제 가봐야 되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독일 신학자인 디트리히 본 훼퍼(Dietrich Bonhoeffer)는 세계대전 중에 독일의 수용소에서 나치에게 항거하다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어느 날 간수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는데 그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자기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 감방에 있던 자기 동지들에게 이렇게 인사를 했습니다. "동지 여러분! 이제 나에게는 죽음이 왔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마지막이 아니고 시작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예비하신 아버지의 집에서 만날 때까지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마지막 인사를 하고 감방을 나서는 그에게서 놀라운 평안과 기쁨이 넘쳐 났습니다. 그 감옥에 있었던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의 마지막 모습을 충격과 감동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천국 소망에도 미혹이 있습니다. 천국이 분명히 있고 그곳은 이 세상 보다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곳이지만 나는 죽는 것이 더 좋아, , 빨리 천국가고 싶어하는 것은 결코 정상적인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희 어머님은 제가 신학생 때 돌아가셨고, 저의 장인 어른은 제 아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그 분들이 다 천국에 가셨음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가족들이 겪었던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천국에 가고 싶다고 하면 제 아내나 제 딸들은 얼마나 당황스럽겠습니까? 교인 여러분들도 알겠어요. 빨리 죽게 해달라고 기도할께요.”하는 것이 믿음 좋은 것일까요?

 

천국 소망이 분명한 것 같은데 미혹인 것은 현세를 부정하고 염세주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성경에 유명한 하나님의 종들이 빨리 죽고 싶어 했던 기록이 나타나 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도 여호와께 차라리 죽여주십시오.” 하고 기도했던 적이 있었고, 모세도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기도드렸던 적이 있었고,

 

요나도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라고 기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이 세상이 힘들다고 천국으로 데려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소망은 언제 죽나?” 하며 죽는 순간을 기다리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소망은 천국을 믿지만, 천국가는 것 보다 이 세상에서의 사명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24절 내가 육신으로 남아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

 

25절 나는 이렇게 확신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발전과 믿음의 기쁨을 더하기 위하여 여러분 모두와 함께 머물러 있어야 할 것으로 압니다.

 

사도 바울은 천국을 소유했지만 이 세상에서 더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주의 복음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교회를 든든히 세우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어느 날 산에 올라가 천국에 계시는 모습으로 변화되셔서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셨던 적이 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함께 있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제자가 보았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라고 말했다고 했습니다. 아마 저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 제자와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산 아래에는 귀신들린 아들과 괴로움 당하는 아버지와 가족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 아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한 때, 제 자신이 영적으로 완전해지려고 애를 썼습니다. 온전히 경건하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수도원에 들어가는구나.!’수도원에 들어가는 사람이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이 또 하나의 나의 욕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거룩한 사람, 완벽한 사람이 되려는 것이 욕심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이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평생 자신이 완벽하기만 추구하고 산 사람은 결코 칭찬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도를 깨우치기 위하여 도를 닦는 종교가 아닙니다. 생명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사십니까? 죽지 못해서 사십니까? 죽는 것이 두려워서 더 살고자 하십니까? 아니면 세상 살기 힘들어서 죽기를 원하십니까?

 

죽음을 바로 준비하고 살아야 합니다. 유언장을 작성하여 유산을 분배해 놓고, 수의나 묘터를 준비했다고 죽음을 준비한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외면하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과 함께 죽음을 직시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죽음의 비밀이 열립니다. 두려움이 사라지고, 오히려 삶을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알게 됩니다. 삶이 송두리째 변화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습니다. 본문에서만 그리스도에 대하여 다섯 번 언급하고 있습니다.

 

1:19 나는 여러분의 기도와 예수그리스도의 영의 도우심으로 내가 풀려나리라는 것을 압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도움을 받고 있었습니다.

 

20절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아무 일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온전히 담대해져서, 살든지 죽든지,전과 같이 지금도,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시리라는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몸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존귀히 여기심을 받으셨습니다. 사도 바울과 함께 하심을 사람들이 알았다는 것입니다.

 

21절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사도 바울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았던 사람입니다. 여기서부터 예수님과 늘 동행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천국을 알고도 고난의 길, 사명의 길을 기쁨을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의 비밀을 알려면 예수님과 함께 죽음을 보아야 합니다. 죽음을 바로 보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놀라운 지혜가 생기게 됩니다.

 

이동원목사님은 여행을 떠나기 전 반드시 유서를 쓰는 습관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떠날 때마다 조금씩 고쳐 쓰고는 유서를 비서 자매에게 맡기고 여행을 간다고 했습니다. 이 유서에는 교회에게 드리는 메시지. 가족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습관을 가진 후부터 여행이 매우 진지해졌다고 합니다. 하루 하루의 발걸음, 한번 한번의 설교가 마지막을 준비하는 진지함을 가져다 주었답니다. 설교할 때마다 큰 역사들이 있어 죄를 회개하고 결단하는 뜨거운 부흥의 시간을 갖게 된다고 했습니다.

 

저도 유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강한 은혜를 얻었습니다. 삶 전체가 새롭게 보이고, 매 순간 순간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고, 예수님과 더욱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의 시

 

공원묘지를 걷는다. 수많은 무덤이 줄을 지어 가지런히 앉아있다.

각 무덤마다 비석 하나 석상 하나. 그들의 살림살이는 하나같이 조출하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어떻게 살았을까.

 

그들도 아마 사링하고 미워했겠지.

바쁘게 쫓기고 화내고 그리워하고 후회하고 그렇게 살아갔겠지.

 

그들은 얼마나 사랑했을까.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혹은 욕심내며 빼앗기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살았을까.

 

그도 역시 식당에서 밥이 늦게 나온다고 화를 냈을까.

차가 막힌다고 욕을 했을까.

많이 소유하기 위하여, 성공하기 위하여 밤늦게까지 일을 했을까.

 

자 이제 남은 젓이 무엇인가. 한 개의 비석 한 개의 이름 하나의 석상

이것을 위하여 그는 그토록 수고했는가. 잠을설치며 마음을 졸이며 살아왔는가.

 

그는 어떤 추억을 남겼을까. 가족들은 그를 무엇으로 기억할까.

그는 사람들에게 은총을 주었을까, 아니면 고통을 주었을까.

그들의 가족은 슬퍼했을까 울었을까 후회했을까.

 

동그랗게 채워진 묘지도 있고 아직 평평한 비어있는 묘지도 있다.

저 비어있는 묘지의 주인은 지금 어디 있을까. 무엇을 하고 있을까.

 

염려하고 있을까 실망하고 있을까 분노하고 있을까.

그는 자신이 이곳에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석상 위에 놓여 있는 아름다운 꽃다발. 그는 고인의 누구였을까.

그는 고인으로부터 무엇을 추억할까.

 

그는 슬퍼했을까 울었을까 후회했을까.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들이 아끼고 사랑했던 육신은 여기 있으나

그들의 영혼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가.

 

이제 나는 내 삶의 자리로 다시 돌아온다.

내 차례가 올 때까지 조금 더 정결하고 조금 더 사랑하고 조금 더 축복하며 조금 더 이 길을 걸어야 하리라

 

나의 떠남이 사람들에게 영감의 시간이 되며

소망과 그리움의 시간이 될 수 있도록 조금 더 걸어가야 하리라

 

행복한 죽음 후회없는 안식을 위하여 후회없는 이별을 위하여

오늘도 사랑의 길을 가야 하리라

 

사도 바울 처럼 분명한 소망을 가지기 원하십니까?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왕정원목사, 아무리 힘들어도 "죽겠다!" 하지 말고

"주께-있 다!" 하라! 탁월한 지혜입니다.

 

분명히 소망을 달라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다 분명한 소망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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