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사랑할 때 비로서 눈이 뜨입니다 / 요일2:7-17 / 유기성 목사
한 자매가 신학생과 교제하게 되어, 부모님께 인사시키려고 집에 데려왔습니다. 저녁식사를 한 뒤, 어머니는 남편의 옆구리를 찌르며 물어볼 것을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청년을 서재로 불러 물었습니다.
"앞으로 우리 딸아이와 살 집은 장만할 수 있겠는가?" 청년이 대답합니다. "열심히 주의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실 겁니다." 아버지가 다시 묻습니다. "결혼하려면 돈이 필요할텐데?" "열심히 사역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실 겁니다."
아버지는 약간 당황해하며 또 다시 묻습니다. "앞으로 아이들을 낳아 키울 대책은 있나?" 그러자 청년이 확신있게 또 대답합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테니까요." 아버지가 어떤 질문이 해도 답은 똑같았습니다.
"하나님이 공급해 주실 겁니다." 아버지가 서재에서 나오자마자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여보, 어때요?" 그러자 아버지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 청년 말이야. 문제투성이야. 마땅한 직업도 없고, 모아둔 돈도 없는 것 같아. 한 가지 긍정적인 건 저 친구가 나를 하나님으로 믿고 있는 것 같아?"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사람과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보는 것이 너무나 다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저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도 차이가 엄청납니다. 보는 눈이 완전히 다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게 되었습니까?
지난 임원훈련 때 오신 황병구본부장께서 요즘 청년들이 교제하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교제를 시작한지 100일 되는 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시계상 시간을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건의 시간이라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사귄지 100일냐 200일이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처음 손잡은 날이 언제냐는 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하나님과 손잡았으셨나요? 언제 입마춤을 하셨나요?
하나님을 믿었다면 하나님과 사귀며 사랑하는 관계가 되기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미운 사람이 없어지고 사람이 사랑스럽다는 것입니다.
9절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습니다. ...
“빛 가운데 있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을 갖고 산다는 말입니다. 주님과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형제 자매 중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실제는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주님과의 사귐, 주님과의 사랑이 없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11절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둠 속에 있고, 어둠 속을 걷고 있으니,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미워하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눈이 가리워 있는 것입니다. 눈이 왜 가리워있습니까? 마귀가 눈을 가리운 것입니다.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그러므로 지금 누군가를 미워하는 사람은 정신차려야 합니다. 이 말씀이 불편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괜히 미워하겠습니까? 미워할 만한 이유가 있으니 미워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에 그저 미워하는 사람이라고만 하였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왜 문제일까요? 미움, 그 자체가 영적인 뿌리가 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움을 살 정도로 잘못한 사람도 문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미워하는 것도 악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미움의 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움의 영에 사로잡히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저 사람 내 버려두면 큰 일 날텐데.” 걱정하는 사람은 미움에 사로잡힌 자신이나 걱정해야 합니다. 미워할수록 악은 더 힘을 받습니다. 악한 영의 양식이 미움이기 때문입니다.
임원훈련에 오셨던 조현삼목사님께서 교인들이 싸우기에 왜 싸우냐고 하니“다 잘해 보자는 것이 아니겠습니까?”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 싸우지 말고 보통만 합시다. 하고 외쳤답니다.
아직도 미운 마음을 풀리지 않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그에게 말씀합니다.
12절 자녀 된 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그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미운 사람도 있을 수 있지 않겠느냐? 화 낼만하니 화를 내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생각을 하셨다면 십자가가 가능했겠습니까? 저나 여러분이 구원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속죄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미워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면 구원도 잃어버릴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13-14절에서 두 번이나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이라고 말씀하면서 죄사함을 받은 사람에게 일어난 일을 거듭 말씀하고 있습니다.
13절 ... 여러분이 태초부터 계신 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미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음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마귀를 이기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진 모든 문제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고 마귀의 종노릇한 데서 시작되었고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에서 죄사함을 받음으로 해결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맺어졌습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이루어졌습니다. 죄 뒤에서 우리를 지배하던 마귀가 꺽어졌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가 받은 사랑이 얼마나 큰 지 알아야 합니다.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안에 오신 성령 하나님, 이 엄청난 사랑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형제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게 됩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시 37편을 묵상하다가 놀라운 체험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시편 37편 1절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하시고는 10절에 가서는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하였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가 눈 앞에서 다 사라진다는 약속은 믿어지지 않는 약속인데, 이 약속이 목사님께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이렇게 쓰셨습니다.
“어느 순간 주변을 아무리 자세히 살펴봐도 악인이 눈에 띄지 않는 것입니다. 미운 교인이 다 사라진 것입니다. 그 때가 어떤 때일까요? 실제로 교인들이 다 착해져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 마음이 은혜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 마음에 미움이나 비판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순간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입니다. 큰 일이 벌어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앞이 안보이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므로 빨리 십자가 은혜 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으로 보면 아무리 자세히 살펴도 악인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또 하나 깨달아지는 것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15절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이 말씀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편하고 부담스러울 수 있을 것입니다. 성공해야 되겠다는 끔과 소원을 가진 사람에게는 현실도피적인 생각이 아니냐, 염세주의적 생각이 아니냐, 소극적 세상관이 아니냐 불만스러울 것입니다.
자매에게 “남자는 다 늑대야”, 형제에게 “여자는 다 여우야” 하는 식처럼 들립니다. 이런 자세로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너무 심한 것 아닙니까?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결혼하는 신부에게 “이제 다른 남자를 사랑하면 안돼”, 신랑에게 “이제 다른 여자를 사랑하면 안돼.” 하는 말은 어떻습니까? 옳은 말입니까?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탕자에게 “세상을 사랑하면 안돼.” 말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노아가 가족들에게 “세상을 사랑하면 안돼.” 할 때는 어떻습니까?
소돔과 고모라에 사는 롯이 아내와 딸들에게 “우리가 비록 소돔과 고모라에 살지만 이 땅 소돔과 고모라를 사랑하면 안돼.” 할 때는 어떻습니까?
일제 강점기 독립 운동에 참여한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결코 세상을 사랑하면 안된다.”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이단들이 횡행할 때가 될 때 “아무 집회나 모임이나 가면 안돼.”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렇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안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이해되고 통하고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은 불가능한 요구입니다.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유혹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15절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속에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이것이 하나님에게서 왔는가? 세상으로부터 왔는가? 분별해야 합니다.
16절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체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은 모두 하늘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사라져 버릴 것인가? 영원히 남을 것인가? 분별해야 합니다.
17절 이 세상도 사라지고, 이 세상의 욕망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마음에 돌덩어리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몰라서 안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설교를 위하여 기도하는데, 사랑하는 선교사님의 글 하나를 읽게 되었습니다.
조동욱 선교사님은 인도 실리구리에서 16년간 사역하고 계십니다. 이제 60세도 넘었습니다. 지난 한달간 한국을 다녀 가셨습니다. 그런데 인도로 떠나시기 전날 페이스 북에 글을 하나 올리셨습니다.
장로수련회 중에 이 글을 읽으며 저도 울고 장로님 권사님들도 다 울었습니다. 우리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목은 [내가 인도로 되돌아 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였습니다. 제목에서 마음이 쿵 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
“한 달 동안의 모국 방문을 마치고 인도 선교지로 들어가기 하루 전날 새벽기도 시간, 이젠 인도로 돌아가야지 하고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를 시작하는 순간 갑자기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두려움이 나를 짓눌렀다. 인도라 생각하니 모든 것이 아찔해진다.
인도의 여름, 뜨거운 태양 아래 먼지 쌓인 시골 길을 걷기엔 나의 건강이 너무 약한 듯하다. 에어콘이 고장난 선교 짚차를 타고 산골을 치닫기엔 이제 너무 버거울 것 같다. 무면허 운전사가 몰던 차에 부딪혀 피투성이가 된 채 몸을 가누지 못하고 길 바닥에 내동댕이 쳐 누워있던 그 때, 그날따라 궂은 장마비는 왜 나의 마음을 그토록 서글프게 적시었든지, 생각할수록 인도는 무서워진다. 내가 왜 그곳으로 다시 되돌아 가야 하나?
나는 한 때 낯선 인도 땅을 마치 정든 고향 길 걷듯이 아무 두렴없이 다녔다. 그런데 지금 엉뚱한 생각이 내 마음에 자리 잡는다. 그래 인도로 돌아가지 않아도 돼. 엉뚱한 물음들이 쉬지 않고 솟아난다. 네가 반드시 인도로 되돌아 가야 할 이유가 없지 않으냐?
깊이도 알 수 없는 구렁텅이 같은 힌두교와 씨름하며 숲 속에 빽빽이 들어선 나무처럼 앞길을 가로 막는 인도 정부와 힌두교 열심당원들을 헤치고 힘들여 그 땅에 들어 가야 할 이유가 뭐지?
인도 땅을 벗어나는 데에 걸림돌이 될 만한 것들을 하나씩 떠올려 본다. 가장 먼저 가족들이 떠오른다. 선교사 가족이라는 명분? 난 이미 그런 명분이나 명성이란 것과 담을 쌓은 지는 오래거든.
인도에 남아 있는 아내? 염려할 것 없어. 전화 한 통이면 언제든지 쉽게 빠져 나올 수 있지. 아이들? 그들은 선교지에서 겪을 것은 모두 다 겪고 고등학교를 마친 뒤 이미 한국에 들어와 있지 않냐?
인도에 이미 뿌려 놓은 사역들은 어떡할 것이냐고 ? 걱정할 것 없어. 그 모든 것들은 언제든지 버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냐? 신학대학을 설립한 것이며 그리고 학장이란 자리? 그건 언제든지 버릴 수 있어. 오히려 무거운 짐을 벗는 홀가분함이 더 할 걸. 개척해 놓은 교회들은 어떡하냐고? 이미 세워둔 목회자들이 잘 이끌어 나갈거야 .
복잡했던 생각이 정리가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음도 편안해 지는 것 같다. 주님께 기도했다. 아무래도 그 분의 확답을 받아야 할 것 같았다. ‘주님, 이제 인도로 들어가지 않아도 되죠? 주님, 한 마디만 그렇다고 말해 주세요. 내가 인도에 들어 갈 이유가 없다고. 그만하면 잘 했다고 말해 주세요.’
그러나 주님은 엉뚱한 질문을 내게 던져왔다.‘너 정말 인도로 되돌아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느냐? 정녕 그 땅을 떠나고 싶으냐? 그래 네 맘대로 생각하고 쉽게 떠날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좋아, 네가 인도를 떠난다면 나도 인도를 떠나랴?’
나는 깜짝 놀랐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질문이었다. 그리고 계속 속사포 처럼 물으셨다.‘네가 인도를 떠난다하여 나도 인도를 떠날 것 같으냐?’ 순간 아찔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아무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예수님이 인도를 포기하지 아니하심을 알았다. 그런데 내가 인도를 포기한다고? 생각이 여기에 다다르자 나는 큰 목소리로 부르짖었다.“하나님, 아닙니다. 그럴 순 없습니다. 예수님이 떠나지 아니 한 인도, 하나님이 버리지 않은 인도를 떠나지 않겠습니다.”
순간 또 다른 강한 성령의 음성 들려 왔다.‘네가 자신감이나 용감함 때문에 인도를 다시 밟아서는 안된다. 네가 인도로 되돌아 갈 단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할 수많은 인도의 영혼들 때문이다. 오직 그들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기 위해서 뿐이다.’
갑자기 내 속 깊이 통곡이 터져 나왔다.‘주님 제가 잘못 했습니다. 주님, 아무 조건없이 제가 인도로 들어가겠습니다. 하나님이 버리지 아니하는 땅과 그 땅의 영혼들, 그들을 사랑하기 위하여 들어가겠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그 땅을 다시 밟겠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처음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감격하며 황소같은 목소리로 기도하며 뜨거운 눈물로 교회 마룻바닥을 적시던 그 기도를 다시 올릴 수 있었다.
조동욱선교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분명히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저도 장로님들도 수련회가 마쳐지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마음은 인도로 돌아가는 선교사님의 마음같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목사와 장로만 그렇습니까? 우리 모두가 이런 마음으로 세상으로 가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사랑하여 영원히 살 곳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세상과 담쌓고 살 곳도 아닙니다. 세상은 우리의 사명지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일터사역 컨퍼런스에서 박정관목사, 교인들이 식당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흔히 보는데, 그랬다면 예수님께서 그 식당에 오신 것 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조용히 대화하고 종업원에게 주변 손님들에게 식당 주인에게 주님께 하듯이 하여야 합니다.
식사 기도는 열심히 하면서 그 뒤에 아무렇지 않게 떠들고 불평하고 행동하는 것은 전도만 가로막게 됩니다. 식당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한 것처럼 나는 죽고 예수님으로 처신해야 합니다.
여러분, 미운 사람은 없어졌습니까? 세상이 선교지처럼 보입니까? 그 눈이 뜨이기를 기도합시다.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 외에는 미움과 세상에서 우리를 건질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기 힘쓰시기 바랍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산다.“ ”예수님 나의 왕이십니다.“ 외치며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이미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입니다. 우리 마음에 오셨습니다. 반드시 주님을 바라보는 사랑의 눈이 뜨일 것입니다.
“주여,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제 눈을 열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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